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허삼관 매혈기/ 위화

열공달 2018. 6. 13. 17:07


허삼관 매혈기의 감명깊은 부분 발췌


아래는 본문 중 나오는 이야기.


방씨가 허삼관에게 물었다.

“어때 피를 팔았는데 어지럽지 않은가?”

“어지럽지는 않은데, 힘이 없네요. 손발이 나른하고, 걸을 때는 떠다니는 것 같은게...”

“힘을 팔았으니 그럴 수밖에. 우리가 판 건 힘이라구. 이제 알겠나? 자네 같은 성안 사람들이 말하는 피가 바로 우리 촌사람들이 말하는 힘일세. 힘에는 두 가지가 있지. 하나는 피에서 나오는 힘이고, 나머지 하나는 살에서 나오는 힘이야. 피에서 나오는 힘은 살에서 나오는 힘보다 훨씬 더 쳐주는 법일세.”

<중략>

방씨가 거들었다.

“근룡이 말이 맞소. 내가 방금 피를 판 건 집을 짓기 위해서요. 두 번만 더 팔면, 집 지을 돈이 충분해지거든. 근룡이가 피를 판건 우리 마을의 계화를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이고. 원래 계화는 다른 사람이랑 정혼이 되어 있었는데, 이번에 파혼을 해서 근룡이가 눈독을 들이고 있지.”

<중략>

허삼관은 텅빈 집에서 하룻밤을 잔 뒤 도저히 이렇게 지낼수는 없겠다는 생각에, 어떻게 해서든 방씨가 가져간 물건들을 도로 찾아와야겠다고 다짐했다. 그러다 보니 피를 파는데 생각이 미쳤고, 이어서 십 년 전에 방씨랑 근룡이랑 같이 피를 팔던 순간이 떠올랐다. 이 집안은 그날 피를 팔아 이룬 것이다. 그런데 오늘 다시 피를 팔 이유가 생겼다. <중략>

허옥란은 여전히 큰소리로 말했다.

“어렸을 때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. 피는 조상에게 물려 받은 거라, 사람이 꽈배기나 집, 전답을 팔 수는 있지만 피를 팔아서는 안 된다고. 몸뚱이는 팔아도 피는 절대로 팔아서는 안 된다고요. 몸은 자기 거지만, 피는 조상님 거라구요. 당신은 조상을 팔아먹은 거나 다름없어요.”

<중략>

허삼관이 잠든 후 허옥란은 손에 삼십 원을 꼭 쥐고 문간에 앉아 텅 빈 골목을 바라보았다. 바람이 불어 먼지가 날렸다. 허옥란은 희뿌연 담벼락을 응시한 채 혼잣말을 되뇌었다.

“일락이가 대장장이 방씨네 아들 머리를 박살 냈을 때 피를 팔러 갔었지. 그 임 뚱땡이 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피를 팔았고. 그런 뚱뚱한 여자를 위해서도 흔쾌히 피를 팔다니. 피가 땀처럼 덥다고 솟아나는 것도 아닌데. 식구들이 오십칠 일간 죽만 마셨다고 또 피를 팔았고, 앞으로 또 팔겠다는데.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고생을 어떻게 견디나. 이 고생은 언제야 끝이 나려나.”

<중략>

이락이네 생산대장이 나간 뒤 허옥란은 문간에 서서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렸다.

“월말이라 집에 이 원 밖에 없는데, 이 원으로 어떻게 식사 대접을 하나?<중략>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락이네 생산대장인데. 식사 대접이 시원찮아서 기분이 언짢아지기라도 하면 이락이가 당장 힘들어질 거 아냐.<중략>”

허옥란은 울먹이며 방에 앉아 있는 허삼관에게 통사정을 했다.

“여보 당신이 한 번 더 피를 파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.”

<중략>

여기까지 말을 마친 허삼관이 가쁜 숨을 몰아쉬자 노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.

“그렇게 계속 피를 팔면 목숨에는 지장이 없겠수?”

“며칠 있다 쑹린에 또 팔 건데요.”

“아니 먼저는 힘을 싹 팔고 그 다음엔 온기를 싹 팔았다더니, 그럼 이제는 목숨만 겨우 남았을 텐데, 또 피를 팔면 그건 목숨을 팔아넘기는 거 아니요?”

“설령 목숨을 파는 거라 해도 전 피를 팔아야 합니다. 아들이 간염에 걸렸거든요. 지금 상하이의 병원에 있는데, 가능한 한 빨리 돈을 모아 가야지 몇 달을 더 기다렸다가는 아들이...”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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